글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스무살이 넘은 사람의 인상에는 그 사람의 일면이 배어있다.고유한 생김새와는 별개로 마음이 드러나는 표정을 스무 해 넘게 지어왔으니 그 흔적이 남기 시작한다. 다만 인상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을 경계해야한다. 겉모습은 치장이 가능하니까. 그렇지만 사람의 얼굴은 분명 늘 희미하게나마 그 본질의 일부를 품고 있다.

글은 내면에서 나온 것이므로, 결코 완전한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글은 그 내용이 어떤 것이라도 분명히 어휘라는 수단을 통해 주로 간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문장의 조직방식, 단어의 선택, 쉼표 마침표 그리고 따옴표의 빈도, 문단의 구분. 이 모든것은 그 자체로 시니피에이자 시니피앙이다. 스스로를 숨기는 문장과 과시하는 문장과 극적인 효과를 노리는 문장, 슬픔을 눌러 담은 문장과 환희를 표출하는 문장. 그 형식은 정말로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진실함을 꾸며내는 어떤 문장이 실은 경박하다면, 반드시 경박한 단어를 가볍게 남발하며 그것을 표현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그 개인의 수준과, 경향과, 아름다움과 추함, 선함과 악함 모두를 표현한다. 빛을 표현하기 위해 어둠이 사용될 때 견딜 수 없는 이질감을 느끼는 것처럼, 글은 그 진실을 덮으려는 순간조차 진실을 말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사람의 글을 믿는다. 의도치않게 풍겨나오는 젊음의 치기, 자기 과시, 희망과 절망, 욕망과 질투, 아름다움이 그 전체를 순수하게 대변하고 있노라 믿는다.

글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누군가가 내게 부당한 이유로 모든 행동거지를 평가내리고, 시시콜콜 비난하기 시작한 건..두 가지 의미로 슬픈 일이다. 첫번째로는, 이미 변질된 인간관계 속에서도 우리가 좋은 추억을 공유한다는 것이 슬프고, 두번째론 그 역시 번지르르하게 말을 하지만, 고작 이런 오해에 허물어지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임을 알아버린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깨달아 가는 것.

나는 예민하다. 변덕스럽고, 아주 잘 변한다. 그래서 깊은 관계를 맺는 타인에게 너무나 큰 영향을 받는다. 그들의 범속함이 내 속의 어떤 요소에 영향을 미칠 때, 다시 말하자면 남몰래 보석같이 여겨왔던 자신만의 고유함이 물처럼 흘러드는 타인으로 뒤덮일 때 심한 불안을 느낀다. 자신이 소거되고 관계만 남을 때 견딜 수가 없다.

관계의 고통은 타인을 잃는 것이 아니라, 늘 흔들리는 자신을 직면하는 것에서부터 왔다. 어떤 지켜야 하는 자신의 고유 영역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모든 관계에서 견딜 수 없는 단 한가지 “범속함”

정말이지 비뚤어진 채로 자랐다니까.

08 mai 2012 

1. 감성이 연약한 것은 정신의 취약함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약한 감성을 가지고도, 청명하고 강건한 정신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 감수성과 정신력은 충분히 다른 문제이다. 그 둘을 단련하는 방법에 있어 나는 서로 전혀 다른 식으로 접근한다.

2. 아래에서 위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정당화하는데 필요한 권위는 얼마만큼일까. 그 시선에 거부감이 생기는 것은 적당한 권위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쏟아내는 어리석은 어휘의 편린들, 왜곡된 시선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의미가 없다. 더불어 그럴 권리조차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지금 시도하는 것은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것이자, 진실을 투명하게 보려는 노력이다. 타인은 배제된다. 그 어느때라도 어휘는 진중하게 선택되어야 하며, 이 선택이 받아들여지기 위한 권위를 쌓아가는 시간이야말로 나의 젊음이다.

03 mai 2012

이토록 관성이 없는 삶은 정말로 오랫만이다.

나를 과거로 이끄려고 하는 모든 것과 인연을 끊다시피 했다.

경박한 계산이나 치기어린 호기심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통로를 도려냈다.

뒤에 남겨두고 온 것들은 너무나 보잘것없기 때문에, 현재의 내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자신이다.

내 삶은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신을 보듬고,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치 않는 것에 충실한 반응을 보이는, 즉, 세상에 자신을 증명하는 일련의 혹독한 과정 그 자체이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이 이 속에 있다. 결코 잃을 수도, 무언가와 바꿀 수도 없다.

삶에서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어 과거에 얽매인다는 말, 이 와닿는다

휘루 & 3호선 버터플라이 - 그녀에게

2003년 영화 ‘…ing’의 ost. 10년이 다 되가는 영화인데 삽입된 노래들은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거나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다. 기본적으로 얼떨떨하게 만드는 빠른 전개의 신파이지만,당시에 내가 입었던 옷들이나, 감상적인 여중생으로서 했던 생각들을 되새기게 해주는 나름대로 괜찮은 영화였다. 노래에 한해선 하나같이 요새 트렌드에 걸맞을 만큼 몇 년씩을 앞서 있어, 감독의 취향에 놀라게 된다.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이 작품 이후 제대로 된 영화가 없다)

En Transe…ylvanie

(Par Dracula, l’amour plus fort que la mort)

프랑스에서는 대중예술의 전반적인 지향수준이 높다. 여기서 수준이 높다는 의미는, 문화 자체가 상류/지배계층 위주라는 것과 문화에 대한 전반 지원/해석 수준이 상당함을 동시에 뜻한다. 특히 한국과 놓고 비교할 때 공연쪽은 무력할 정도로 엄청난 갭이 느껴진다. 작년 하반기에 드라큘라를 재해석한 뮤지컬 <드라큘라,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주제곡 중 하나가 이렇게 클럽을 연상시키는 새로운 버젼의 뮤직비디오로 만들어졌는데, 고전적인 컨텐츠를 이렇게 써먹는건  참 대담한 시도인 것 같다. 

어디선가 한국은 고증에만 강하지 재해석을 잘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나는 으례 한국을 무조건적으로 깎아내리는 시선에도, 문화가 그저 고급 지향적으로만 가는 것도 모두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공연에 한해, 프랑스가 한국을 몇십 년 앞서있다는 판단은 맞는 것 같다.